詩다움

2008 시사랑 인사동 *가을정모* 시낭송 詩 모음

초록여신 2008. 11. 10. 08:16

 

2008 시사랑 인사동 *가을정모* 시낭송 詩 모음


 

시를 그냥 눈으로 읽는 것과 마음을 담아 그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시읽기가 되어 듣는 이에게는 감동을 두 배로 전해주었었지요. 정모에 오셨다고 가정하시고 정겨운 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한번 멋지게 낭송해 보시면 어떨까요?

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거울을 보면서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답니다. 그리고 음악과  배경이 된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의 방법으로 시를 읽으면서 함께 정모의 물결 속으로 몰입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원문과 다른 경우 말씀해 주시면 수정하도록 할게요.(다래투님께서 정현종의 시집 [별 아저씨]에서 '빵'이란 시를 낭송해주셨는데 제가 그 시집이 없고 검색 결과에도 나오지 않아서  도움을 받긴 했지만, 출처의 정확도가 약하답니다. 그 시집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거나 그 시집을 선물받으신 분은 확인 부탁드립니다.)

번호순대로 낭송했답니다.

홍기석님은 등단하신 분이시라 본인의 시를 외워서 낭송하셨었지요. 그 시를 듣는 미혼의 여성분이 계시다면 영원한 반려자가 될 것 같습니다.

모두들 목소리가 참 낭랑하시고도 고우셨지요. 자신의 아름다운 미성을 지니신 아름다운 목소리였답니다. 정모와는 별개로 야외에서나 다른 곳에서 시 낭송회를 한 번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개인적 생각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그럼, 시의 물결 속으로 빠져 보세요. 

 

 


 

1. 상처(강연호) - 초록여신

2. 그런 것 없겠지만, 사랑이여(박정대) - 별빛님

3. 사랑을 붓 끝에 실어 당신을 그립니다(홍기석) - 홍기석님

4. 더럽고 질척한 강 깊은 곳에(오쉬쁘만젤쉬땀) - 오쉬쁘상님

5. 나무는 나무로(이태수) - 사탕dk님

6. 절대고독(김현승) - JOOFE님

7. 빵(정현종) - 다래투님

8. 아, 24일(문태준) - 소누렁님

9. 나의 별에 이르는 길(박수진) - 하늘에님

10. 나무 한 권의 낭독(고영민) - 오래된골목님

11. 낙엽 엽서(jwkim) - JOOFE님께서 홍콩에서 직접 보내주신 편지를 대신 읽어주셨답니다.




상처(강연호) 


밑바닥 상처는 고요한 법이라고

나 어느 날 무심코 중얼거렸네 강물 위

빗방울에 흔들리는 무수한 파문처럼

사소하게 가슴 다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파서 자주 엄살 떨었는데

저 파문 이는 강물의 표면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도 제 힘 다해

빗방울 튕겨내는 걸 보았네

깊은 속내까지는 덧내지 않으려

멈칫멈칫 맺혔다 풀리는 동심원을 보았네

이 사내 저 사내 다 받아주는 작부의 자궁 속에도

딱딱한 각질처럼 굳은 순정 하나는 있어

열리지 않고 끝내 고요하리라

나는 너무 쉽게 가장했나 보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아닌 상처를 들쑤셨더랬네

그 길의 상처에 빚 갚을 일 많았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

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

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네

하나도 아프지 않았네



그런 것 없겠지만, 사랑이여(박정대)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사랑을 붓 끝에 실어 당신을 그립니다 (홍기석)




추억 속의

당신 얼굴 생각나지 않아


종이를 펼쳐

당신을 그려 봅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며

그렸건만

내가 알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붓끝에 사랑이 빠져서

그런가 봅니다


추억 속의 사랑

아니 지금도 가슴 속에 간직한

사랑을

붓 끝에 실어

당신을 그립니다


그리워합니다





더럽고 질척한 강 깊은 곳에 (오쉬쁘만젤쉬땀)

 

 


더럽고 질척한 강 깊은 곳에

바스락거리는 갈대처럼

열렬하게 나른하게 아늑하게

금지된 삶을 숨쉬며 자라난 나.


차갑고 음습한 은신처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랑거리며 인사하는

짧은 가을의 시간.


꿈결 같은 삶 속의

잔인한 고통을 즐기는 나,

모든 이를 은근히 질투하고

그들을 남몰래 사랑한다.

-1910년


 

 


나무는 나무로(이태수)

 

 


있는 그대로를 껴안기로 했다. 뒤집고


뒤집다가 보면 결국


모든 것은 나를 비껴서 있을 뿐.


나무는 나무로, 돌멩이는 돌멩이로,


하늘의 구름은 하늘의


구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가 저만큼 떠나고 있는, 아니면


내가 이만큼서 서성이고 있는,


그 사이의 바람 소리를, 미세하지만 완강한


이 신음 소리를 껴안기로 했다.


이즈음은 물 소리나 바람 소리에


귀를 맡기고, 마음을 끼얹고, 숙명과도 같이


내가 택한 이 오솔길을


걷기로 했다. 터덜터덜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풀꽃이나 버티어선 바위,


돌부리에도 눈길을 주고


오늘의 이 지상,


이 가혹한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떠도는 꿈을 지우며, 때로는


힘겹게 꿈을 돋우어내며


걷기로 했다. 담담하고 당당하게


풀잎은 풀잎으로, 아픔과 슬픔은


아픔과 슬픔으로,


지워질 듯 되살아나는 희망은 차츰씩


보듬어 안아올리기로 했다.

 

 



절대고독(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



   * 시집, "절대고독"(1970)

 

 

빵(정현종)

 

 


 술 한잔 하고 어떤 빵집 앞을 지나는데 그 집 앞에 내 키 반만한 플라스틱 인형을 세워놓았다. 안에 불을 켜 환한 인형 거죽에 ‘빵’이라고 써놓았는데, 그걸 보는 순간 내 속에도 불이 들어와 환해진다. 그 ‘빵’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농부와 양곡상과 운전사와 방앗간집과 빵굽는 이와 빵집 주인과 인형 만든 이와 전기 기술자와 간판장이와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빵’이 있기까지 줄줄이 보이는 그 사람들의 실루엣이 너무 이뻐서 나는 그 ‘빵’을 앙꼬처럼 이리 빨고 저리 핥고 하여간 그러면서 걸어왔다.

 

 



아 24일(문태준)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소천小川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나의 별에 이르는 길(박수진)

 

 


가벼워야 하리 내 영혼

저 하늘 빛나는 나의 별

먼 그곳에 닿기 위해선

쌓고 채웠던 모든 것

허물고 비우고 덜어내

더 가벼워야 하리.


흐린 눈으로는 가지 못하리

미움과 욕망의 체중으로

더욱 가지 못하리

언젠가는 내 가야할 곳

머언 그곳에 닿기 위해선

비우고 덜고 버려야 하리.


가벼워진 몸으로 훨훨 날아

새벽 하늘 맑은 별자리로

나 떠오를 수 있다면

잠들지 못하는 지상의 꽃들과

모든 가난한 생명들의

따뜻한 벗이 되어 빛나리니...


오랫동안 비워 둔 나의 별

멀고 먼 그곳에 닿기 위해선

날마다 뜨거운 눈물로 씻어

가벼워야 하리.


내 영혼

둥둥 가벼워야 하리...




나무 한 권의 낭독(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악어, 실천문학사(2005)



낙엽 엽서(jwkim)

 

어쩐지 시월이 가기 전에

한 자 적어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쯤 가을은

저 홀로 깊어가고 있겠지요

어쩐지 가을이 가기 전에

그 먼 이름 한번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쯤 단풍도

제 슬픔의 무게로 지고 있겠지요

먼 그대여, 몸살 앓던 지난 여름날

그대에게 긴 편지를 썼으나

또 부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름 모를 낙엽 위에 한 자 적습니다

이 가을에, 시월이 가기 전에

어쩐지 한 자 적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그대 이름 부르고 싶었습니다

(jwkim님의 블로그에서, 복사가 안되는 관계로 적어 왔습니다. 2008. 10. 30. 0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