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슬픈 빙하시대 1 ~ 5 [허연]

초록여신 2008. 11. 6. 00:26

 

슬픈 빙하시대 1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쳐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덮은 덤불이 당신의 슬픔이겠지요.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

 

 

슬픈 빙하시대 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 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슬픈 빙하시대 3

 

 중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늘 용서가 된다. 설령 수만 년 동안 고쳐지지 않은 악습이 날 따라잡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잔인했던 내력이 반짝이며 돌아오더라도.

 

 

 강가에서 뼈들의 과거를 읽는다. 한때는 사랑이나 환멸이었을 그 뼈들이 이렇게 또 반짝이며 부서진다. 나의 뼈는 고개를 넘고 물살을 헤치고 어디쯤 나아갈까. 쓸쓸할 테지. 아무 기억도 남지 않았을 테고.

 

 

 저 잔인하게 벌어진 땅의 틈새로 어이없이 처박힌 뼈들의 과거.

 

 

슬픈 빙하시대 4

 

 나에게 월급을 주는 빌딩 뒤에는 타입캡슐이 묻혀 있다. 콘톰이며 뭐 이런 것들이 있단다. 기념이란다. 난 그래도 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간 사람을 존경할 줄은 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매우 실존적인 잡놈이다.

 

 

 착각은 오류를 따지지 않는 법. 오늘도 나는 시내로 돈을 벌러 간다. 돈 벌러 온 놈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으로 15년째. 시내는 세상의 중심이다. 물론 착각으로 판명 날게 뻔하다. 개구멍에라도 빛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또 하루를 썩힌다. 욕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밤마다 내가 사나운 백상아리가 되는 꿈을 꾼다.

 

 

슬픈 빙하시대 5

 

 잉글랜드 축구 3부 리그 수비수가 날 울릴 때가 있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MRI 찍는 통 속의 고독을 견디는 구순의 노인이 날 울릴 때가 있다. 쓰러지기 전 거품 문 투우의 마지막 진실 같은 거. 그게 날 울릴 때가 있다.

 

 

 누군가와 일요일 아침 식은 밥을 물에 말아 먹고 싶고, 겨울 내내 촌스러운 화장을 하는 여자. 카운트는 끝나가는데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곧추세우려는 실패한 복서의 눈빛 같은 거. 절대 고독 안에 뒹굴고 있는 입석들의 폐허다. 인생은

 

 

 떨어지기 전, 떨어지기 전, 그 간들거림.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