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외 3편 [송찬호] ㅡ 2008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코스모스
지난 팔월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와
코스모스 가을 신상품을 소개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가늘고 긴 꽃대와 석청 냄새가 나는 꽃은
밀교에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헌데 나는 모가지가 가는 꽃에 대해서는 오래 바라보다
반짝이는 조약돌 하나 얹어두는 버릇이 있다 코스모스가 꼭 그러하다
가을 운동회날 같은 아침 조무래기 아이들 몇 세워놓고
쉼없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저 근육 없는 무용을 보아라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 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코스모스 면사무소 첫 출근날
첫 일과가 하늘 아래 오지의 꽃밭을 다 세는 일이었던,
스물한 살 지방행정서기보
바람의 터번이 다 풀렸고나 가을이 길어간다
대체 저 깊고 푸른 가을 하늘의 통점은 어디인가
나는 오늘 멀리 돌아다니던, 생활의 관절
모두 빠져나간 무릎 조용히 불러 앞세우고
코스모스길 따라 뼈주사 한 대 맞으러 간다
고양이
여기 경매에 내놓으려 하는 오래된 꽃병이 있어요
이제 꺾은 꽃가지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그러니 누가 저 꽃병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시간이에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한때는 방안을 뒹굴던 털실몽상가와 잘도 놀았답니다
현기증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
요즘은 부쩍 네 발 달린 것에 믿음이 가는가봐요
네 발 달린 의자에 사뿐히 뛰어올라 털실이 떠나간
털실바구니에 들어가 때때로 달콤한 오수를 즐기지요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안의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요
칸나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항상
발갛게 목이 부은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이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가방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직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 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마하게나마 들리지는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는지 않는지
* 2008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ㅡ 수상작 중에서, 중앙일보.중앙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