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언제나 며칠이 남아 있다 [위선환]

초록여신 2008. 10. 12. 09:22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야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훤히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둥근 해와 둥근 달과 둥근 모과알의 둥근 그림자들이 밟히는 며칠이 또 남아 있었고

 

 

 잎이 지는 어느 날은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남은 며칠이 지나가야 겨우 모과나무는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므로, 그때는 이미 모과나무가 가지에 허옇게 서리 꽃 피고 나는 길을 떠나 걸어가고 있을 무렵이므로

 

 

 치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에는 걱정 말끔히 잊고 내가 혼 맑아져서 돌아온다 해도

 

 

 모과꽃 피었다 지고 해와 달과 모과알들이 둥굴어지는 며칠이 또 남아 있을 것이고, 어느 날은 내가 잎 떨어지는 모과나무 아래로 걸어가서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되물을 것이니......

 

 

 

 

 

* 새떼를 베끼다, 문학과지성사(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