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종이를 아프게 하다 [이선영]

초록여신 2008. 9. 4. 18:38

 

 

 

 

 

 

 

 

당신에 대한 나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당신은 아프다고 한다

아프다고 내게서 뒷걸음치는 당신을 붙잡느라 나는 남은 사랑을 다 써버렸다

 

 

나의 펜은 종이 위에 많은 글자들을 써왔다

종이 위에 펜은 그가 쓰고 싶은 어떤 글자든지 쓸 수 있었고

종이는 펜이 쓰는 모든 글자들을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펜 아래서 달아나지 않고

 

 

종이를 향해 쏟아지는 펜의 뜨거움 때문에

종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당신에 대한 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뜨거움으로

나의 펜은 오늘도 종이를 아프게 한다

 

 

 

 

*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문학과지성사(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