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기차역 [허수경]
초록여신
2008. 8. 26. 06:38
그때 나 갓 스무 살
그 거리, 혼불이 든 영혼의 거리
그대를 기다렸네
내 옆에 보자기를 풀어 빗이나 실이나 단추를 팔던
아낙, 그때는 80년대
독재자의 얼굴로 돌이 날아가고
흰옷을 입은 여자들이 한 거리에서 춤을 추고
그대가 오던 길이 막히고
아낙이 젖 먹던 아이의 얼굴을 시커먼 손으로 훔쳐주며
고개를 숙일 때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시계를 바라보며
오후를 넘긴 해가 멀리 지구의 저 너머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때 내 영혼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대여, 이 속수무책은 그때 그 도시를 다스리던 독재자의 선물인가.
내가 그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느낌,
내 일생의 어떤 순간도 더 이상 기다림으로 허비하지 않겠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기다림을 거부하며,
어둑한 그 거리에서
아낙이 단 하나의 빗도 팔지 못하던 그 거리에서,
어떤 독재보다 더 지독한 속수무책은
내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검열했고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믿지 않는 것, 그때,
그대는 끝내 오지 않고
지금 나는 사십이 되어 비 오는 이방의 어둑한 기차역에 서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오십 분 연착된다던 기차는 두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고
펑크 계집아이 하나가 맥주 하나 마실 돈 달라고 손 내미는데
지금 이 속수무책도 그때 그 독재자의 선물인가,
나, 그때 지금까지 당도하지 않는
그대를 기다려야 했는가
*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