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헛소문 [정채원]

초록여신 2008. 8. 2. 23:28

 

 

 

 

 

 

 

 

 

 

잿빛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피 묻은 스카프를 주워 들고

자기는 오백 년 전에 죽었던 조선의 임금이라 소리쳤다고 하네

한 마을에서는 노숙하던 스님이 자다 깨어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달게 마셔 버렸다고 하네

이천 년 전 한 유대인 남자는 가시관을 쓴 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네

그리스의 한 시골 호텔에서는 침대 밖으로 비쭉 나온 손님의 발을

벨보이가 침대 길이에 맞게 잘라 버렸다고 하네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난다고 하네

헛소문이 돈다고 하는 그 말이 다 헛소문이라고 하네

헛소문만 입 안에 굴리던 나는 배가 고파

고등어구이에 밥 한 공기를 후딱 먹어 치웠는데,

지금은 가시만 남은 고등어

아무도 내 식탁 위의 고등어를 본 적은 없다고 하네

나는 고등어를 먹었다고 우기고

아래층 여자는 내가 실종된 자기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우기네

그새 다시 배가 고파진 나도

헛소문을 퍼뜨린 내가 후회스럽네

 

 

한때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남자, 허쏘문

그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있고, 열면 또 문이......

내가 다 열어 보기도 전에 그는

박물관 옆 도서관 지붕 위에 잠시 머물던 구름처럼 사라져 버렸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다 헛소문이었네, 목숨처럼

 

 

 

 

*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민음사(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