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바람궁전의 기억 [정채원]

초록여신 2008. 8. 2. 23:05

 

 

 

 

 

 

 

 

 

 

 

 

 언제쯤이었을까요 고스트 댄스를 추느라 땀범벅이 되었던 그 밤이었을까요 아니면 무성한 느릅나무를 지나 결혼식 행렬이 언덕으로 올라오던 오후, 하얀 웨딩드레스와 베일에 가려진 신부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그때였을까요 바람결에 얼핏 드러난 얼굴, 그 물먹은 눈동자와 한순간 마주쳤을 때, 바로 그때였는지도 모르지요 저는 제가 죽었는지도 몰랐어요 바람궁전의 조그만 벌집 같은 창문들, 깨어진 유리 틈새로 들락거리는 바람을 마시며 앉아 있던 그 나른한 오후, 눈물인지 땀인지 내 젖은 볼을 바람새가 핥아 주었지요 고통을 모르는 희귀병 환자처럼 바람에 머리칼 한 움큼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뼈에 숭숭 구멍 뚫리는 줄도 모르고 언제나 바람을 기다렸지요 바람에 파도치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누군가의 마지막 한숨 같은 바람이 내 어깨를 흔들었는지, 꿈길을 헤매듯 더듬더듬 바람궁전을 빠져나왔어요 저는 제가 죽었는지도 미처 몰랐어요 툭 치면 가루가 될 듯한 뼈만 남은 제가 아직도 창가에 앉아 뿌리 뽑힌 느릅나무를 바라보고 있네요 밑둥은 다 말라 갈라 터져 버렸는데도 우듬지엔 연두 몇 잎 매달고 있는 나무, 아직도 제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아, 봄날이 가고 있네요 다시 바람이 불까요

 

 

 

 

 

*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 민음사, 2008.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