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여관 [박형준]
먼 옛날의 동물들은 초록여관에서
모자를 쓰고 다닌다 강물 소리가 나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때로는 불타는 피를 뒤섞은 강물 굳은 관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는다
저녁에는 관을 장식한 꽃 속에 벌이 죽어 있다
1004호나 1927호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주 멀리까지 달아나버린 강물 소리를
삐걱이는 침대 밑에서 듣는다
풀숲 쥐를 잡아먹고 화단에 몸을 비비는 뱀
첫 번째 비행을 시작한 저 새가
동녘의 하늘 속에서 장미를 물고 오는
초록여관에서
*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8 올해의 좋은시,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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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허혜정(문학평론가. 한국사이버대 교수)
먼 옛날에는 동물들이 쓰고 다니던 "강물 소리가 나는 모자"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자 속에 흐르던 강물 소리는 멎었다. 자연의 활력이 거세되어버린 시간은 딱딱하게 고정된 사유의 화석으로 남는다. '모자' 속에 흐르던 강물 소리는 결국 딱딱한 언어 속에 갇힌다. 하지만 화자는 어느 한적한 초록여관에서 담배 피우며 "아주 멀리까지 달아나버린 강물 소리"를 듣는다. 공룡의 순수한 산책처럼 사유와 언어 뒤에 열리는 풍경은,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그대로인 '초록'의 시간과 연결된다. 시인은 잊혀진 언어, 사라진 소리들을 향해 언어를 연다. 강물 소리는 말의 길을 가르쳐주는 자연의 화살표, 혹은 시인의 심리적인 회향성을 내포한다. 거기에는 끝없이 언어를 지워가는 소리가 있다.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라 자연의 속삭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