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혹등고래 [문혜진]
초록여신
2008. 7. 23. 16:01
눈을 떴을 때, 바다의 아가미로 사라진 잠수부 이야기가 스크린 가득 펼쳐지고 짙은 코발트블루 위로 쏟아지는 폭설, 바다의 독백, 왜 하필 그랑블루의 마지막일까 남자와 여자는 처음 만나 할 말도 없이 쭈뼛대다 대충 취해 이토록 낯선 대학가 DVD방, 막막한 푸른색 속에 서로를 밀어 넣은 채, 축축한 알코올 냄새, 허리에 감은 팔은 묵어의 빨판처럼 난데없고 젠장할! 뭉텅 끊어진 필름
봅슬레이 속도로 엄습하는 물살, 무지개송어 빛 오라, 사방에서 물이 차오르고 심해의 비밀을 발설하듯 여자가 숨을 참으며 겨우 입을 달싹인다 넌 누구냐? 분자처럼 반짝이는 발광해파리 떼, 천장에서 황급히 꼬리를 감추는 풍선뱀장어 넌 범고래에게 찢긴 채 쫓기던 혹등고래였잖아,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리로 바다를 매만지는 너의 울음을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지 오늘은 내가 어깨를 빌려 줄게
몸속 유전자 그 오랜 기억의 유랑, 뗏목 위에서 물을 따라 흐르다가 자고 일어나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첫 표류의 태양처럼 이토록 낯선, 푸른 스크린 아래 눈물로 가득 채운 혹을 깔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주거니 받거니 코를 고는 혹등고래들
* 검은 표범 여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