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낮고 깊게, 하지만 넓고 높게 [이태수]
초록여신
2008. 7. 22. 11:16
낮고 깊게 내려가리. 내려가고
내려가다가 더 내려가지 못해 멈춰 서서
마음의 깊은 골짜기, 푸르게 일렁이는 풀잎에
이슬방울 되어 맺히리. 이슬방울로 맺혀
둥글게 글썽이며 환한 햇살 끌어안으리.
여전히 아득한 그를 더듬어 오르리.
투명하게 부서지는 햇살들을 부여안고
까마득하게 올라가서 그곳까지 날아오른
새들과 어우러지리. 새들의 퍼덕이는 날개에
꿈 많던 시절의 바람들 불러 모아 싣고
하늘의 옥빛, 아득한 옷자락 길게 끌며
다시 내려오리. 그리운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지러진 얼굴들이지만, 모두가
아프다, 아프다고 소리지르지만,
이 풍진 세상에 마음 가지런히 내려놓으리.
더 내려놓을 수 없을 때까지 내려놓으며
더욱 깊고 낮게 엎드리리. 한없이 내려가서
다시 투명한 하늘 꿈꾸며 걷고 걸으리.
아득하지만 느껴지는 그를 찾아 떠나리.
햇살 가득 안고 푸른 풀잎에 투명하게
글썽일. 둥글게 글썽이는 한 방울의 이슬,
나는 다만 한 방울 이슬 되어 맺히리. 언젠가는
그와 더불어, 그와도 가슴과 이마 맞대면서.
마음은 언제나 낮고 깊게, 하지만 넓고 높게
먼 하늘 하염없이 우러러 걷고 걸으리.
* 내 마음의 풍란 / 문학과지성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