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살구를 따고 [장석남]

초록여신 2008. 7. 10. 17:18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올라간 가지 사이사이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져본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한결 높다란 저녁을 맞네

 더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들어본다네

 살구를 따서 쥐고는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지나간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창작과비평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