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마지막 유리알 유희자 [헤르만 헤세]

초록여신 2008. 7. 4. 22:21

 

 

 

 

 

 

 

 

 

 

그의 장난감, 오색 구슬을 손에 들고

그가 허리 굽힌 채 앉아 있다, 그의 주위에는

전쟁과 흑사병으로 유린된 나라가 펼쳐져 있다. 폐허 위에는

사철 담쟁이가 자라고, 담쟁이 속에서는 벌들이 윙윙거린다,

소리 낮춘 시편과 더불어 지친 평화가

세계를 울린다, 고요한 노년기를.

노인은 그 오색 구슬들을 헤아린다

여기서 푸른 구슬 하나, 흰 구슬 하나 잡는다,

저기서 큰 구슬 하나, 작은 구슬 하나 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원을 그려 유희가 되게 한데 모아 넣는다.

그는 한때 상징의 유희에서 뛰어났었다,

많은 예술의, 많은 언어의 대가였다

세상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널리 여행한 사람이었고

지구 양극까지 알려진 명사였다

늘 제자들과 동료들에 에워싸였었다.

이제 그는 남겨져, 늙고, 소모되고, 혼자이다.

이제는 어떤 제자도 그의 축복을 구하지 않는다

어떤 명인도 그를 토론에 청하지 않는다.

사라져 버렸다, 사원도, 도서실도,

카스탈리엔*의 학교들도 이제는 없다. 노인은

페허에서 쉬고 있다, 손에 구슬들을 들고

한때 많은 말을 했던 천상의 상형문자들,

이제 그것들은 다만 오색의 유리 조각들일 뿐.

그것들이 소리 없이 고령자의

두 손을 벗어나 굴러간다, 모래 속에서 유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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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세의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 (1943)의 배경이 되는 미래의 이상 사회.

 

 

 

 

 

 

* 헤르만 헤세 대표 시선,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