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표범약국 [문혜진]
초록여신
2008. 7. 4. 08:45
청담동 표범약국에는 표범약사가 있지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표범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넷을 하다가
귀찮은 듯 안약을 카운터에 슬쩍 밀어 주지
호랑이 연고도 팔고
무당거미의 독이 든 마취제도 팔지만
새끼 표범 침으로 만든 구강 청결제라든가
호피로 만든 무좀 양말 따위는 팔지 않아
인간의 육체를 포장해 온 무수한 환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맹수의 공격 본능으로 학살을 일삼고
모피를 찬양하며
발정제를 사러 약국에 가지
이 겨울 다국적 패션 거리에는
베링해 섬 출신의 북극여우 털로 만든 재킷이 있고
덫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밍크쥐의 가죽을 수백 개 이어 만든 코트가 있지
내가 만약 난파선의 선원으로
북극여우의 섬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면
내 격랑을 팽팽하게 껴안은
이 무용한 거죽으로 깃발이라도 만들어 흔들어야 하나
물어 버리기 위해
이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이빨이 없어서
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청담동 표범약사는
밤이면 긴 혀로 유리창을 핥으며
우아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 검은 표범 여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