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말의 퇴적층 [신용목]

초록여신 2008. 7. 3. 11:17

 

 

 

 

 

 

 

 

 

 

 

내가 뱉은 말이

바닥에 흥건했다 누구의 귓속으로도

빨려들지 못했다 무언가 지나가면

반죽처럼 갈라져 사방벽에 파문을 새겼다

누구도 내 말을 몸속에 담아가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문을 닫고 사라졌으며

아무도 다시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빈 방에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뱉은 말은 바닥에서부터 차올랐고

이내 키를 넘었다 그때부터

나는 걷기를 포기했다 길고 부드러운 혀로

말의 반죽 속을 헤엄쳤다 와중에도

쉴새없이 말을 뱉었고 뱉을수록 한가득

된반죽처럼 뻑뻑해졌다

더러 문틈으로 바람이 불고 해가 비쳐

반죽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나는 점점

움직이기 힘들었고 마침내

꼼짝할 수 없었다 말들이 마저

다 마르자 나는

풍문같이 화석이 되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마지막 순간 그 우연한 자세가

영원한 나의 육체였다

몇만년 후 지질학자는

말의 퇴적층에서 혀의 종족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멸망한 시인을 증명할 것이다

 

 

 

 

 

*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창비, 2007.

 

 

 

 

.......

 누구의 귀도 울리지 못하는 말은 근원적인 '말씀'(Words)에서 퇴행한 무의미한 '말'(words)의 집적일 뿐이다. 갈라져서 벽에 파문을 새길 뿐인 그 '말'의 퇴적을, 이제는 아무도 몸속에 기억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완강한 불통(不通)의 이미지, 그리고 빈 방의 독백으로 물러서는 퇴행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시'는 바닥에서부터 차올라 키를 넘어 지속된다. 하지만 그 '말'은 반죽으로 말라 "풍문같이 화석"이 되어버린다. 그 '화석'이야말로 '말'의 이중적 자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형상일 것이다.

ㅡ 유성호 (해설, <바람의 뼈마디, 말의 허기> )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