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바람의 지문 [이은규]

초록여신 2008. 6. 23. 09:25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ㅡ 신작 시

 

 

 

 

 

* 2008 젊은 시, 문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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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1978년 서울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6년『국제신문』,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