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심보선]

초록여신 2008. 6. 16. 09:38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가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 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문학과지성사, 2008. 4. 18. 

 

 

 

 

.......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그 시간의 매듭 속에 갇히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이 있어 오늘을 즐길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합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초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