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 러브체인 [고형렬] ㅡ 제23회 2008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마천루 러브체인 [고형렬]
러브체인이 흔들리고 있었죠 당신들 생각엔
내 속눈썹 가까이 그림자가 지나가던
하오, 그 하루가 돌다리 물을 건너갈 때
오색의 구름을 유리창에 비춰주었죠
꿈은 가여운 여름 끝의 엽육을 뚫은 뒤
벌레들이 구멍을 지나가게 열어두고 있었죠
향일을 위해 한줌 흙을 얻는다 해도
마천루 정상은 구름 속에 가려지고 말지요
창을 열고 소리치는 아이의 작은 얼굴
하늘에 묻히는 달처럼 아스라한 기억 속에
보세요, 이곳엔 죽고 없잖아요 물가의 잎새들
절대 열리지 않는 창가에 살면서
달개비의 알파벳을 받아쓰는 눈과 혀의
미끄러운 연어나라 풀잎 지느러미들
환한 빛이 들어와요, 눈동자만 한 손바닥들
엽맥의 목소리와 또 여름내 간지러운 글의
의미가 파랗게 도금되면서 말이에요
당신들은 알고 있었죠, 쌓이지 않는 빛들이
나의 손바닥을 뚫고 떠나가 버렸음을
내가 상공의 바람처럼 물을 보냈다는 것을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언어라는 것을
지금도 허공을 열고 닫고 기억한다고 해요
러브체인의 빛은 그때부터 아팠다고 해요
이른 삭풍에 달개비들은 사라지고
러브체인은 마천루 창가에서 태양을 향했죠
나의 순간 장난감 [고형렬]
나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나를 당신의 이름 속에 묶으려 하지 말아요
당신의 길이 있으면 당신 길을 가도록 하세요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아요
우리는 너무 오래 서로의 이름을 불렀어요
나의 이름을 혼돈 속으로 불러내고 싶어요
그리고 아직 분명한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도 어떤 망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는 필요를 버리고 싶은가 봐요
내가 어떤 미명의 약속 외에 구름과 바람
또 다른 아침의 꽃으로 왔다 할지라도
현재가 아득한 과거의 현재이길 바라요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 애쓰지 말아요
이제 당신은 나에게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스스로 혼자 있게 놓아줘요
조용히 담 밑에서 햇살을 받게 해요
해가 지는 도시 서향의 한 정류장에서 나는
당신에게 너무 오래된 말을 하고 있어요
나는 황폐화를 기념한다 [고형렬]
나는 이미 황폐화를 시작했다
이 황폐화가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갈지 모른다
시를 뜯어고치기는 나를 뜯어고치기보다 어렵다
오래전, 시에 비할 것이 없었으므로
나의 앞에 수많은 생이 기다린다 해도 미완의
그 한 편의 시만 못했다,
더 이상 시가 씌어지지 않는다는 변명
환상은 나를 무한의 유혹으로 떠돌게 할 것이고
너는 어느 메타포의 시궁창에 처박힐 것이다
계속 흔들리는 심실 근처, 밖에서 웅성대는 침묵들
저들이 임시로 꿰매놓은 내장의 아우성
너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들이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를 생각해봤는가
꿈꾸는 것들의 하부에서 실종된 이름들
고쳐지지 않는 병력 같은 언어, 조사, 종결어미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꼭 하나의 외상을 남긴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계속 변형한다
그때 네가 내리지 않을 역의 선착을 예측하고
누구보다 빨리 출발했지만,
결국 황폐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의 귀속
내가 도달할 곳은 오직 황폐화한 나의 이 내면
여기서 이름 없는 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됫 한쪽의 시단에 묻혀
이미 얼굴을 묻고 숨 쉬고 있다
* 제23회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우수상 수상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