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2008년 시사랑 * 인사동 정모 * 낭송시 詩 모음]

초록여신 2008. 5. 27. 06:20

 

 

[2008년 시사랑 * 인사동 정모 * 낭송시 詩 모음]


 

 


비움의 미학 (나승빈) ㅡ 다래투님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을

채워갈 때가 아니라

비워갈 때이다.

 

사람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건

다 비워 놓고

채우지 않을 때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비워 놓고도

마음이 평화로울 때이다.

 

 




사랑하는 까닭(한용운) ㅡ 별희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바람아래(이정록) ㅡ 보둠이님


제 얼굴로 겨눴던 부채 끝을

어린것들에게 돌리는 데까지 가야

마음도 주름을 접고 편해지는 거여

자네도 땀 범벅인 몸뚱어리 제쳐놓고

새끼들한테 부채질하는 것을 보니께

이제 진짜 어미가 된 것 같구먼

세상에서 첫째로 독한 짐승이 어미라는데

어미 중에서도 제일 독한 홀어미가 되었구먼

신랑 생각은 빨리 털어버리고

여기에다 맘 붙이고 살아가자고,

멍하니 평생 바다 끝만 내다볼 것 같더니

어찌어찌 새끼들 추스르는 것을 보니께

이제 가라고 해도 안 가겠지만

바람아래 떠나는 순간

세상 바람통 속으로 겨 들어가는 것이여

저 뻘 속 모래알들이 어찌 그냥 모래들이고

어찌 그냥 조개껍질이겠는가

억만 번도 더 달래고 얼래야

밀물 썰물 몽땅 품을 수 있는

오지랖이 되는 거여

그런 걸 몸이라고 하는 거여

 

 

 

 

 

기탄질리 12번 (타고르) ㅡ 땡삐님

기탄잘리(신께 바치는 송가)  

 

 

     연꽃이 피었던 날  아,아

 

     내 마음은 헤매고 있었고 나는 꽃이 핀 것도 몰랐습니다

 

     내 바구니는 비었는데 그 꽃을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때때로 슬픔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꿈속에서 깨어나 남녘 바람에서 한줄기

 

     이상하게 감미로운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 어렴풋한 감미로움은 내가슴을 그리움으로

 

     아프게 했고 그것은 내게 완성을 찾는

 

     여름의 뜨거운 숨결로 보였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가까이 있음을 그것이 내 것임을

 

     이 완벽한 감미로움이 내 자신의 깊은 가슴속에서 꽃피었던

      

     것임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ㅡ 아름다운세상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기별 (권애숙) -여린청솔님

 


참 오래 걸려
여자의 코트가 당도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코트가
돌아오는 동안 여자의 집엔
진눈깨비가 추적거렸고
앵두꽃이 터졌고
태풍 '우쿵'이 쿵쿵거리다 갔다

-너무 오래 찾아가지 않아서……

세탁소 남자는 여자의 부재를 물었고
부재를 메우듯 허둥거리던 나는
천천히 천 원짜리 일곱 장을 세어 주었다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할 무렵
느닷없이 돌아온 벨벳 꽃무늬 코트,
여자가 보내 온 뜻밖의 기별이었다

그 곳은 늘 꽃 피고 따뜻하다고

 

 

 

노을 (김용택) ㅡ 비가와님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
출렁이는 당신의 어깨가 지워진
사랑의 무게가
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옵니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사랑은,
사랑은
때로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


 


꽃잎이 피고 질 때면 (김혜순) - 초록여신


꽃잎 돋으면 어쩌나. 가려워 어쩌나. 봄이 왔다고

산천초목 초록 입술 쫑긋 내미는데 이제 어쩌나. 당

신들의 들러붙은 무릎 사이. 당신들의 맞붙은 입술

사이. 세상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 비집고 이파리 돋

아나는데 어쩌나. 나 엎드려 기어가서 이 초록 벌판

다 짓이겨버리려네. 이 환한 초록 바다. 깊은 구멍

다 메꿔버리려네. 초록 속에는 시신들이 내뱉는 추깃

물. 쓰디쓴 파랑. 검은 떫음. 붉은 비린내. 입술 화한

노랑. 다 들었으니 나 이 깊은 구만리장천 연초록 구

멍들 다 씹어 삼키려네. 이것들 뭉개서 온몸에 칠갑

하려네. 내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개 밥그릇에 밥

던져주던 사람 앞에서. 내 입으로 내 구멍으로 이

풀밭 이 산천 이 넓은 초록 바다 다 짓이겨버리려네.

온몸에 깜깜한 눈 번쩍 뜨려네. 꽃이 피면 어쩌나.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가려워 어쩌나. 자장자장 그

꽃 재워줄 손길도 없는데.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데. 뜨거운 몸 뒤트는 이 연

초록 벌판 어쩌나.

 

  기도하라하네 쉬지말고기도하라하네 눈물로간청하

라하네 순종하라언제나순종하라그러네 이 세상 구멍

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서를 빌지 않고는 이 세상

넘어 갈 수 없다하네 무릎꿇으라하네 벌레처럼머리를

조아리라하네 두손으로 싹싹빌라하네 낮추고낮추라하

네 무릎을꿇고오줌발을받으라하네 가슴을치며회개하

라하네

 

  열두 마리 새끼 밴 개 한마리처럼 입에 거품을 물

고 네발로 땅 짚고 배를 맨땅에 부비며 새싹들을 뭉

개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봄인지 겨울인

지 비척비척 가려워 아 가려워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래져서 한눈에 보이지도 않

는 여자가 하나 지나가네 뒤뚱뒤뚱 지나가네

 

 

 

 

 

 긍정적인 밥(함민복) ㅡ 사탕dk님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생生-접속사接續詞풍으로 (윤관영) ㅡ JOOFE님


 

그리고그리고그리고로

이어진던 생生은

그런데에서 한방 먹었다

생의 과거가 새끼처럼 꼬이면서 출렁거렸다

그때 그러나가 고개를 들었다 생은

또 생이니까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러니까, 물음표가 옆구리를 찌르고

느낌표가 찍혀서야 생은

구두끈을 매기도 했다

생은 또 생이니까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가슴에 대 보듯이

댈 만한 접속사는 다 갖다

대보기도 했다, 혹 주기마다

도가니 같은 연륜이 쌓이면서 생은

자신이 별 거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한 잔도 하고 연애도 하고

여행도 하다가 이럴 수는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잡고 늘어져도 보았다

대 볼 만한 것은 다 갖다 대 본 끝이라

맨 속은 터수라

전처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믿어 보기로 한다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 배신이라는 것을

그런, 접속사도 끌어댈 나름이라는 것을

안 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게 당할 것을

준비한다 그러나 물고 늘어질 것이

그밖에 없는지라 제 앞에 그를

세운다 답이 없는 문제지를 받아든 것을 짐짓

감 잡은 생은 담배를 꼬나물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하는 체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앞세우고

한 잔하러 나간다

 

 

 

과일가게 앞에서 (박재삼) ㅡ 플로우님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나는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 연애(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구름 속으로 (김경인) ㅡ 오쉬쁘만젤쉬땀님


천천히 사라지고 있군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고 생각해


미끈거리는 꼬리를 싹둑 잘라내고
뒤죽박죽 흩어져볼까
지독한 냄새를 흘리며


나무는 이파리에 숨어 초록을 견디는데
나는 여전히 초록이 두럽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복면을 뒤집어쓴 새는 지겹지도 않나봐
오래전 목소리를 흉내낸다네
또 무엇을 고백하려고


(앵무새야, 블룩한 주머니를 뒤지지 말아다오
성대가 잘리기 전에, 어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신은 자꾸 태어나지
그림자놀이 따윈 다 끝장난 줄 모르고


고백했다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새끼를 가득 품은 눈먼 주머니쥐처럼


그물 속 새는 변성(變聲)을 거듭하며 새 이야기를 낳고
열개의 손가락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워진다네


나는 냄새를 풍기며 부드럽게 스며들지
가장 낯선 얼굴 속으로 

 

 


그물(문태준) ㅡ 지구별여행자님


수풀을 지나간다

 

가을벌레들이 운다

 

몇 겹의 그물

 

완만하고 탄력이 있다

 

촘촘하다가 헐렁하다

 

발이 푹푹 빠지지는 않는다

 

내 심장보다는 크게 얽어놓아

 

멈추어 서게 한다

 

잠시 끌었다가 살짝 다시 놓아준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던가,

 

바람을 타고 날아 흩어지는

 

 

 

수국 지는 밤 (김은경) ㅡ 오래된골목님


밤빨래를 넌다
마당에서 백 년을 산 플라타너스
말라비틀어진 고추나무 잎사귀는
다들 검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바스락 바스락
밤바람에 몸 부비는 소리 듣노라면
저건 수국 꽃잎 지는 소리
이건 또 발에 차인 돌멩이의 흐느낌.
차가운 몸을 덮던 옷가지들이
어느덧 평면으로 돌아가 있다
깃은 잔뜩 움츠려 있고
발가락은 힘이 없고
목덜미에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주일치의 삶, 혹은 하루치의 삶이
견딘 중력의 힘은 투명하고도 위대하다
눈물의 중심부로 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몸부림을 쳤나
땀내 나는 시간은 땟국물로 흘러가도
이렇게 구김으로, 빛바랜 흔적으로 남더라고
빨랫줄을 잡아당긴 채 양팔 벌린
모과나무가 향기롭게 이른다.
지퍼도 단추도 잠그지 않고
온몸 열어 마침내
밤빨래들이 펄럭인다
묵은 그대 묵은 시간
내 손금에 의해 닳아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졌던 것들
날개를 접은 채
지금은 모두 한 줄 선상에 있다
얼룩이 곧 이름이 된 얼룩무늬나비떼처럼.

 



핑도는 그리움(서정윤) ㅡ 방랑자님


온종일 걸었다, 땀 흘리며

그래도 그리운 건 남아 있다

그대 생각을 않으려고

지나가는 바람들 남김없이 읽었다


스치는 그 얼굴들 속에

남아 있는 그대 눈빛이 힘겹다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억지 미소를 지어봐도


돌아서면 그대 그림자,

내 마음에 드리우고

핑 도는 그리움

아직도 나는 그대의 것인가

 

 


입술만 (서정윤) ㅡ 어린왕자님


유리컵에 입술이 남아 있다

그녀 떠난뒤,

오만한 자세로 앉아

내 구해온 꽃병보다 당당하다

 

헝클어진 머리

추스르던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하루의 낯선 느낌

나름대로 끝지점을 알아버린 표정의

우울

침묵을 시작하는 자세로 지키고 있다

 

스스로 구겨진 기억의 자리에

너무 당당한 그녀의 그림

지친 권태의 한쪽을 들고 가버린,

입술만 남아,입술만 남아

입술만......

 

 


 

사막(자작시) ㅡ 소누렁님


낙타야 

넌 여름을 아는구나

쉬었다 또 가자

중천에 걸린 달이 밝다

까맣게 타버린 수세기 속으로

자주 바람이 옮겨 놓는

모래산 심심찮게 길을 막아도

별자리는 전 생애를 풀어

나침반도 없이 떠오르고

이렇게 달 밝은 밤이면

손금 밑으로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애인의 안부가 궁금하다

여름의 꼬리가 밟히기 전에

전갈 되어 방울뱀 되어

숨어서라도 가야만 하는

독 오른 그리움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나가는 사랑이

이토록 고독한 것이더냐 혁명처럼

가시뿐인 선인장도 때가 오면

꽃봉오릴 터트릴 줄 안다

쉬엄쉬엄 또 가자 낙타야

그리움이 바닥나는 그날까지

여기가 나의 터전이고

나의 최후다


 

.......

 

시사랑 정모 후기를 읽은 후, 조용히 감상해 보세요.

사진을 감상하신 분들이라면 실제 모습과도 이미지가 오버랩 될 것 같아요.

누구나 한번쯤은 시를 혼자서 암송하고 남들 앞에서 낭송했던 때가 있었을 거예요.

저처럼 거울 보면서 읽다가 미소짓는 분도 계실테지만요. 그러면서 어린천사에게 박수를 강요하기도 하지요.

꽃그림자님과 미상님께서는 낭송을 하지 못하셨지요.

낭송하려고 마음 먹었던 시가 있다면 올려 주세요. 함께 감상하고 싶어요.

소누렁님의 자작시를 감상하실 분들께서는 [내말이 입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창작시 게시판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어린왕자님 잘 하셨답니다. *(^_^)*

플로우님! 회원들이 직접 올리신 시 검색, 정리, 프린트, 번호까지 적어 주시다니 감사해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낭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흠뻑 빠져 보세요.

다음 정모부터는 詩 낭송의 묘미를 살리고자 비디오 촬영이나 UCC 동영상도 고려해 볼께요.

함께 공유하고자 [정모 후기]게시판이 아닌 이곳에 올리니 많이 사랑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