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새 아침 눈발 스치는 숲길을 간다 [이건청]
초록여신
2008. 2. 7. 13:01
새해 새 아침, 숲길을 간다.
새 아침의 눈발 스치는 숲길을 간다.
이제, 빈손이 된 나무들이
다른 나무 곁에 서서
명상에 잠긴 이 아침,
눈발이 스치는 길을 간다.
동박새 한 마리, 푸르르 날아
물푸레 가지로 옮겨 앉으며
알은체를 한다. 꽁지를
까닥이며 안녕, 안녕 한다.
나는 지금 이 숲의 춤판에
초대받아 가는 길이다.
이 숲의 저켠, 흐린 무덤 하나
눈발에 지워지고 있다.
눈길의 저켠에 혈육 하나 지워지고 있다.
안녕, 나는 멧새의 인사법으로
저켠 숲에게 인사를 하며
함께 가시지요, 형님, 이렇게 말한다.
이 산의 춤판은 눈발 속에 막을 올린다.
나무들은 눈발 속에서 두 손을 치켜들고
서 있다.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끼리,
낙엽송이 낙엽송끼리의 파드되,
바람에 밀리며, 때론 쌓인 눈을 털어내며
부러져 내린다. 아, 비산하는 환희여,
나무들의 춤판이 이리도 신선하구나!
눈발 속에 온 산이, 지금 한창
절정에 이르고 있구나,
이 숲의 새들, 모두 솟구쳐 오르며
격정의 나래를 푸득이고 있구나,
새해 새 아침, 숲길을 간다.
새 아침의 눈발, 스치는 숲길을 간다.
이 길은 갈수록 울울한 골짜기를 열고
눈발은 이 길의 끝까지 희게 희게 덮인다.
자작나무의 춤판이 끝나는 곳에서
낙엽송의 우람한 춤이 시작되누나.
아, 이처럼 광대한 무대 위에서 벌이는
위대한 춤, 새해 새 아침의 눈길을
간다. 눈발 스치는 숲길을 간다.
새 아침의 동박새 한 마리,
알은체를 한다. 안녕,
새 아침 눈발 스치는 숲길을 간다.
*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 세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