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징 [이선영]

초록여신 2010. 5. 16. 08:26

 

 

 

 

 

 

 

 

 

 

삶이 영화일 수 없는 이유는

영화에는 해피엔딩이 있지만

삶에는 해피엔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거지

영화는 이를테면 구멍이 숭숭한 체로 걸러낸 삶이고

그 쳇불의 가장 가느다란 한 오라기까지 해피엔딩을 쏘아올리는 기적의 텀블링일 수 있지만

삶이란 애초에 나도 모르게 불려간 자궁 속으로 징거매어지는 일

 

 

그후로 연속되는 몇차례의 징 박는 작업

딸로 징,

학생의로 징,

월급쟁이로 징,

주부로 징,

엄마로 징,

징, 징, 징

모든 해야만 하는 어려운 역할로서의 징 박기

 

 

곰팡이 핀 밭솥과 함께 남겨진 아홉살 소년의 마지막이 비명횡사여야 한다면

중국인 소녀 마오마오가 1위안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면

흰 상복과 검은 휘장의 장례가 늙은 육체를 위한 마지막 뒤풀이라면

삶은 온갖 저지름의 뒤에 흙의 감방 속으로 징역 살러 가는 일

 

 

꽃처럼 사람도 숨이 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하지만 널 기억하지 못할 생이라면 그 역시 또다른 징거매기

어느날 몸과 마음과 기억을 묶고 있던 나의 몸과 마음과 기억이

차갑게 굳어버린 한 구의 시신 속에 동봉돼 사라지고야 말리라

언도받은, 삶은 언…… 언……언해피엔딩

 

 

 

*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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