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슬픈 검투사의 노래 [류외향]

초록여신 2008. 2. 17. 09:54

슬픈 검투사의 노래

ㅡ삼보일배

 

 

 

 

 

 

 

 

 

 

 

 

 

이상한 결투의 날이었네

검은 투구를 벗고 칼을 내려놓고

연둣빛 꽃송이 하늘하늘 나부끼는 옷을 입었네

푸른 기와를 인 거대한 집 앞으로 실려갔네

이파리 몇 남지 않은 흐린 가로수 아래에서

화창화창 흐드러진 꽃밭인 척

겹겹이 길을 막아섰네

 

 

슬프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네

하얀 파도가 무거운 침묵을 끌고 밀려왔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파도가 허리를 접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내렸네

물거품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그 몸속에 들어 천년만년 살고지던 흙냄새 실려왔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상한 결투였네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네

무거운 침묵이 어떤 칼 든 적보다 무서웠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보도블록 찬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들었네

 

 

내게 검은 투구 씌워진 자의

어둠의 내력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팔았네 나는

그 물결을 꺾어야 하는 방파제였네

땅에 몸 기대고 하늘에 몸 부비는 침묵의 비명 소리 가로막았네

차라리 검은 투구를 씌워주었더라면

차라리 칼을 쥐여주었더라면

저당 잡힌 영혼을 언젠가는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

맹렬히 싸웠을 거네 나는

 

 

하얀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내게 날아와

연둣빛 꽃송이 울먹울먹 젖어들었어도

낡고 여린 관절 삐걱이는 소리 발끝까지 몰려와

내 어머니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어도

 

 

이상한 결투의 날이었네

검은 투구를 벗고 칼을 내려놓고

연둣빛 꽃송이 하늘하늘 나부끼는 옷을 입고

나는 그만 뒤돌아섰네

적들에게 등을 보이고 말았네

 

 

내 심장을 쪼아 먹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

푸른 기와와 나 사이를 돌고 돌았네

 

 

 

 

 

* 푸른 꽃들의 꽃밭, 실천문학사.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인장 [강연호]  (0) 2008.02.19
몸 [조용미]  (0) 2008.02.18
너의 눈 [김소연]  (0) 2008.02.16
신전 앞에 서다 [이혜미]  (0) 2008.02.15
나 홀로 두리번거리다 [이영유]  (0) 2008.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