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검투사의 노래
ㅡ삼보일배
이상한 결투의 날이었네
검은 투구를 벗고 칼을 내려놓고
연둣빛 꽃송이 하늘하늘 나부끼는 옷을 입었네
푸른 기와를 인 거대한 집 앞으로 실려갔네
이파리 몇 남지 않은 흐린 가로수 아래에서
화창화창 흐드러진 꽃밭인 척
겹겹이 길을 막아섰네
슬프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네
하얀 파도가 무거운 침묵을 끌고 밀려왔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파도가 허리를 접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내렸네
물거품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그 몸속에 들어 천년만년 살고지던 흙냄새 실려왔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상한 결투였네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네
무거운 침묵이 어떤 칼 든 적보다 무서웠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보도블록 찬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들었네
내게 검은 투구 씌워진 자의
어둠의 내력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팔았네 나는
그 물결을 꺾어야 하는 방파제였네
땅에 몸 기대고 하늘에 몸 부비는 침묵의 비명 소리 가로막았네
차라리 검은 투구를 씌워주었더라면
차라리 칼을 쥐여주었더라면
저당 잡힌 영혼을 언젠가는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
맹렬히 싸웠을 거네 나는
하얀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내게 날아와
연둣빛 꽃송이 울먹울먹 젖어들었어도
낡고 여린 관절 삐걱이는 소리 발끝까지 몰려와
내 어머니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어도
이상한 결투의 날이었네
검은 투구를 벗고 칼을 내려놓고
연둣빛 꽃송이 하늘하늘 나부끼는 옷을 입고
나는 그만 뒤돌아섰네
적들에게 등을 보이고 말았네
내 심장을 쪼아 먹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
푸른 기와와 나 사이를 돌고 돌았네
* 푸른 꽃들의 꽃밭,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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